PB는 사실 오래 전부터 있었던 유통업체와 브랜드업체 간의 헤게모니(주도권) 다툼의 결과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브랜드업체는 전통적으로 다양한 제조업체와 협력하거나, 직접 상품을 생산하여 이를 ‘브랜드화’하는 데 탁월한 역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통업체는 이러한 브랜드들이 널리 판매될 수 있도록 ‘고객 접점’을 갖추고 있죠.
두 주체는 기본적으로 상품 생산부터 고객 전달까지 전체 가치사슬을 연결하는 협력 관계입니다. 근본적으로 유통업체가 더 많은 고객을 온오프라인 채널에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명성을 만든 ‘브랜드사’의 상품이 필요하고요. 제조업체가 더 많은 매출을 만들기 위해서는 ‘유통사’의 판로가 필요함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두 주체 사이에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는 과거부터 계속해서 이어져 왔습니다. 그 이유는 두 주체가 가치사슬 안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나누고 있기 때문인데요. 주체간 힘의 차이에 따라서 때로는 브랜드사가, 때로는 유통업체가 더 많은 이익의 파이를 가지고 가고자 ‘납품가’를 쥐고 흔드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앞서 쿠팡과 CJ제일제당의 분쟁을 ‘갑질’이라 단순히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서 나오는데요. 트래픽 파워가 막강한 유통사가 브랜드사를 압박하듯, 브랜드 파워가 강력한 제조사들 역시 과거부터 최근까지 유통사를 압박한 사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CJ제일제당이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갑질을 당했다고 하기엔 너무 거대하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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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러한 파워게임의 연장으로 브랜드사는 ‘D2C(Direct to Customer)’라는 키워드를 앞세우며, 자사몰과 같은 자체적인 ‘고객 접점’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고요. 반대편의 유통사들 역시 직접 상품을 기획, 개발하고 제조업체에게 생산을 위탁하여 자체 상품을 확보하기 시작하는데요. 그렇게 등장한 것이 바로 PB인 것입니다.
“PB는 유통업체가 수익성을 높일 수 있는 전략적 대안이라는 측면에서 주목받았습니다. 사실 여기서 PB 자체가 ‘이익’을 높인다기 보다는요. 중간 유통 단계 축소로 원가를 통제하고, 수익성을 만들 수 있는 작전의 폭을 넓히는 수단이라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기존 유통채널에서 공급받았던 NB(National Brand) 대비 주도권을 가지고 가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도 있고요”
- 박진용 건국대 경영대학 교수, 제 11회 유통산업주간 개막 컨퍼런스
PB와 ‘협력’하는 파트너들
사실 PB와 상생할 수 있는 대상은 비교적 명확합니다. 설명에 앞서 잠깐 브랜드사의 개념을 설명하자면요. NB(National Brand)라는 이름으로 전국 단위 명성을 만든 브랜드를 갖춘 대형 제조회사가 있고요. 또 한 편에서는 MB(Manufacturer Brand)라고 일컬어지는 중소규모 제조회사들이 있습니다.
PB는 NB든 MB든 협력 주체를 따로 가리진 않습니다. 최근 화제가 됐던 GS25 PB 상품이자 팔도가 생산한 ‘점보도시락 라면’처럼 대형 브랜드업체도 유휴 공장 라인을 활용하여 위탁생산을 하지만요. 이 중 상대적으로 PB 협력에 절실한 것은 NB보다는 MB일 수 있습니다.
MB 역시 자체 브랜드를 제조하여 전개하지만요. NB만큼의 브랜드 명성을 만들어내지는 못해서 그들의 상품이 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만들어내진 못하고 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PB 위탁생산은 MB 제조사의 새로운 ‘매출원’으로 기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쿠팡의 곰곰 즉석밥 PB 제조업체 ‘시아스’의 2023년 1~5월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7270%나 늘어난 것처럼요.
반면, 기존 시장 지배력을 갖춘 NB 회사들은 PB의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오히려 압박을 받을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단적인 예로, 유통업체들이 CJ제일제당의 ‘햇반’을 공급받길 원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에 채널을 방문하는 고객들이 늘어나기 때문인데요. 만약 유통업체가 전개하는 PB 즉석밥의 영향력이 햇반보다 커진다면요? 햇반이 빠지더라도 매출 영향이 그리 크지 않다면요? 굳이 유통업체는 햇반을 납품받고자 절실해질 이유가 없어질 것입니다.
잘 나가는 PB의 성장 방향
사실 쿠팡뿐만 아니라 대중소를 막론한 수많은 유통업체들이 PB 상품을 기획, 출시하고 있지지만요. PB를 성공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저 역시 수백~수천억원 연매출을 만들고 있는 다양한 온오프라인 유통업체 대표로부터 PB를 만들고 판매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는 고민을 들은 적이 있는데요. 그 이유는 그만큼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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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는 우리에게 매우 어려운 과제입니다. 우리에게 기존 납품하는 업체들의 상품과 비교하여서 더 저렴하게 구해오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원하는 품질 측면의 스펙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제조회사를 찾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인데요. 아직 전체 매출 대비 PB상품의 비중은 낮지만, 킬러 상품 중심으로 PB 비중을 늘려나가고 있습니다”
- 오프라인 채널을 운영하는 연매출 2000억원 규모 리테일 업체 대표
그런 이유에서일까요. 박진용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초기 PB는 기존 NB가 보유한 유명 상품과 비슷한 상품을 보다 저렴하게 만드는 ‘미투 제품’을 중심으로 전개됐습니다. 소비자들 사이에서 ‘노브랜드 (농심) 알새우칩’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마트의 PB ‘바삭한 갈릭새우칩’처럼요. 소비자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어떤 브랜드를 활용하여 더 저렴한 가격에 들어가서 괜찮은 품질을 증명한다면 비교적 빠르게 시장에 자리잡을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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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미투 상품만으로는 ‘PB 때문에’ 매장을 방문하는 고객을 만들기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낮춘 가격 때문에 오히려 이미 브랜드를 갖춘 공급사의 상품을 받는 것에 비해서 이익률이 떨어질 수도 있고요. 공장 생산원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는 ‘규모’인데, 매출이 미미한 초기 PB로는 이미 대량 생산에 들어간 NB에 비해 생산 원가가 비대해질 수 있거든요.
따라서 요즘 PB는 그 자체로 독립 브랜드를 구축하는 ‘프리미엄’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 박 교수의 설명인데요. 심지어 소매업체 브랜드를 전면에서 빼버린 PB 상품들까지 출시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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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선 최근 편의점들이 공격적으로 전개하는 PB 상품들을 예시로 들 수 있는데요. GS25의 ‘혜자 도시락’이나 CU의 ‘연세우유 생크림빵’ 등이 대표적이고요. 이런 독립적인 프리미엄 PB는 ‘오픈런’을 만들 정도로 매장에 방문할 이유를 만들어냈고요. 점포에 방문했는데 해당 상품이 품귀라면, 다른 상품을 겸사 장바구니에 담아 구매하는 부가적인 효과까지 이끌어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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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별개로 여전히 ‘저가’가 파괴적인 힘을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요. 박 교수의 예시에 따르면 점포에 배치하는 상품 대부분을 PB로 채우는 ‘다이소’나 ‘알디(ALDI)’가 대표적이고요. 이들은 통상 구매가 잦고, 저관여 상품들이 모여 있는 생필품(FMCG, Fast Moving Consumer Goods) 카테고리를 중심으로 PB를 성장시킵니다. 나쁘지 않은 품질과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PB의 규모를 키워 원가 경쟁력을 확충하는 방식인데, 쿠팡의 PB 전개 역시 이를 따르고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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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디(ALDI)와 리들(LiDL)로 대표되는 HDS(Hard Discount Store) 운영사들은 통상 400~500평 규모로 우리나라 준대형 슈퍼마켓과 비슷한 사이즈를 운영하는데요. 우리나라 준대형 슈퍼의 SKU가 8000~9000개를 다룬다면, 알디와 리들은 많아야 3000개 정도의 굉장히 적은 SKU를 가져가고요. 그 중 PB 비중은 80~90%에 이릅니다. 저가형 PB뿐만 아니라 프리미엄 PB까지 함께 전개하고 있음은 물론이고요.
이들의 전략은 ‘롱테일’을 완벽하게 잘라내는 것입니다. (SKU가 적기 때문에) 점포에 방문하는 10명의 고객을 모두 만족시키는 것은 포기합니다. 1~2명은 원하는 상품이 없어서 점포를 떠나더라도 상관없다는 것이고요. 대신 회전율을 극대화해서 운영효율을 끌어 올리는 모델입니다”
- 김연희 BCG 대표 파트너, 제 11회 유통산업주간 개막 컨퍼런스
상생이 PB에 도움되는 이유
처음 주제로 돌아와서 PB는 정말 ‘상생’에 도움될 수 있을까요? 사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PB를 강화하면 강화할수록 유통업체의 주도권은 커지고요. 그 주도권의 영향은 PB를 제조하는 협력업체들을 대상으로도 동일하게 펼쳐질 수 있습니다. 상품 공급에 대해서 더 낮은 가격을 요구하는 방식이 대표적이겠죠. 이에 따라 PB를 만드는 제조업체의 매출은 늘어나지만, 이익률은 오히려 매출 증가에 따라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누구 하나의 이익이 누구 하나의 희생으로 만들어지는 제로섬 방식은 오히려 PB의 장기적 성장에 ‘독’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됩니다. 김연희 BCG 대표 파트너는 알디와 리들의 사례를 꺼내며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알디와 리들이 운영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이유는 협력업체와의 수평적 관계에 기반합니다. 예를 들어서 그들은 장기 계약을 통해 파트너사의 고정 공급가를 유지해주고요. 심지어 원가가 올랐다고 하면, 오히려 그 인상분을 매입가에 반영해주기까지 합니다. 이 외에도 협력업체의 신제품 개발 R&D나 자본(CAPEX) 투자를 지원하기도 하는데요. 그들이 왜 이런 일을 하냐면, 괜찮은 협력업체 하나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 김연희 BCG 대표 파트너
김연희 파트너에 따르면 알디와 리들은 장기적이고 강력한 파트너십을 ‘운영 효율’을 끌어올리는 무기로 사용했다고 설명합니다. 실제 이들은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운영비용을 8% 이상 절감함으로, 유통사, 고객, 협력업체 간의 윈윈(win-win) 모델 구축에 성공했다고요.
김 파트너의 예시에 따르면 알디와 리들은 서로 다른 파트너사의 원재료를 공동 조달하는 방식으로 운영비용을 낮췄고요. 점포의 선반 공간에 맞춰 가이드라인을 제공하여 파트너사의 포장 방식을 최적화하기도 했습니다. 기존 포장지가 구겨진 부분에 배치돼 인식률이 낮았던 포장지 바코드를 조금 더 스캔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위치로 바꾼다거나요. 다양한 ‘맛’의 제품을 함께 포장하는 공정을 제조 파트너가 사전 준비하여, 점포 진열 효율을 끌어올리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요. |